Laos

힌탕"Hintang"의 standing stone

JJ네 2009. 3. 17. 16:20

 

1930년대의 라오스의 후아판도에서 있었던 발굴작업으로 대규모의 고대 공동묘지의 존재가 들어났으며 이것은 씨엥쾅 지역의 항아리평원보다 더 먼저의 것으로 믿어진다. 항아리가 아닌 거대한 선돌의 집단은, 최고 150개,  넓은 매장지에 세워져 있으며  지름이 최고 2미터정도 되는 편편한 돌로 덮여져 있다. 이 고인돌들은 기원전 1000~500년전의 것드로 추정되며, 약 20개의 싸이트가 후아판 지역에 산재해있다. 가장 넓고 잘알려진 힌탕의 고인돌 싸이트는 싼콩판 "San Kong Phanh"에 있는것이며, 산 정상을 따라 약10키로미터길이로 3개의 주 군집으로 구성되어져 있으며 각각의 집단은 다른 군집들과 이어져 있다.

 

이 고대 묘지는 길고 좁은 결정편암으로 지면에서 돌출되어져 있으며 겹겹히 세워진 가운데 가장 키가 큰것이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들은 깊은 바위암반속의 매장지 위 그리고 그매장지는 좁은 수직의 통로가 있는 뚜껑의 위에 세워져 있는채로 발굴이 되었다.  싼콩판지역의 싸이트들은 1931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Madeleine Colani에 의해 부분적으로 조사, 발굴되었다 매장실은 많은것을 보관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구멍으로 쓸려나가버린 충적토가 있는걸로 보아 고고학자 Madeleine Colani는 각각의 매장실은 결정편암으로 나뉘어져 여럿 아니면 한명의 것이었을 것이다 라고 추정하였다. 원시적인 유골함과 돌로 만들어진 제사때 쓰여진것같은 물건들을 포함한 초기의 약간의 공예품들이 이고고학자의 원정때 발견이 되었는데, 이것들은 현재 비엔티엔의 라오스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이때를 제외하고는 이지역의 더이상의 발굴작업이나 조사가 없었다.

 

현재 이선돌들은 씨엥쾅의 항아리 평원의 항아리들을 만든 이지역의 옛조상들이라고 믿어진다. 힌탕지역의 선돌과 씨엥쾅의 항아리들에는 약간의 공통점들이 있는데; 선돌지역의 무덤 입구를 덮은 돌뚜껑과 씨엥쾅 지역의 조각이 되어져 있는 항아리의 뚜겅에서 약간의 공통점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후아판의 이 선돌들은  씨엥쾅의 깍아만든 항아리들의 과도기적인 것으로약 기원전 4세기경의 철기도구사용의 도래는 선사시대의 고대공동묘지 창조자들에게 새로운 창조의 기회를  제공한것으로 믿어진다.

 

현지의 전설은  이선돌들을 다른 방향으로 설명한다. 고대의 사람들중 "Ba Hat" 바핫이라는 통치자에게 군림을 당했던 "Kha Yeui" 카 유이 라는 사람에게 신이 3가지의, 첫째는 쌍두의 북- 하나의 얼굴은 적들을 사라지게 할수 있는 얼굴 그리고 또다른 하나의 얼굴은 신의 도움을 요청할 수있는 얼굴, 두번째는 가장 단단한 땅에 묶여진채 땅에서 물을 펑펑솟아나게 하는 엄청난 크기의 부엉이, 셋째로 단단한 바위를 나무처럼 쪼갤수있는 도끼등의 마술적인 물건들을 주었다. 루앙프라방 왕국에 더이상 복종을 하지않기로 결정하자 루앙프라방 왕국은 카유이를 공격했다. 이전쟁의 승리는 카유이의 통치자 바핫에게 돌아갔으며 이사실은 안 루앙프라방의 왕은 다시 반격을 가하여 신의 도움을 청하는 북을 공격하였다. 신은 사람의 모습으로 곧바로 땅에 내려왔으나 적들을 찿아볼수가 없었다. 이에 분노한 신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이유로 북을 회수하는걸로 바핫을 벌하였다. 그러나 바핫은 아직도 2가지의 마술적인 물건들이 있었으니 도끼로 푸안의 계곡으로부터 가져온 돌들을 잘라서 새로운 도시 "Kong Phanh" 콩판을 "Sang An" 상안의 산등성이에 세웠다. 바핫의 힘은 점점 강해졌으며 루앙프라방의 왕위는 바핫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정략결혼으로 하여 게승되어졌다. 왕자는 마법의 도끼와 부엉이를 하얗고 뜨거운 화로에; 그화로는 순식간에 그마법의 물체들을 사라지게 할수있다, 올려놓게 카유이를 설득한다. 달리 방법이 없었던 카유이는 마법의 힘이 사라져버린 그두가지의 물건들을 그곳에 그냥 놔둘수밖에 없었다.그리고 그두가지의 물체는 "Hintang Houamuang" 힌탕 후아무앙의 고대묘지가 되었다.